여기는 문래동의 보호막 같은 느낌이 들어요.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을 운영하셨나요?
저는 30년 되었어요. 오래되었죠.
어떻게 이 동네로 오게 되었어요?
처음에 이런 봉제 공장을 했어요. 그게 88년도부터 하향길이었는데 그때 여기 와서 보니까 작업복 필요한 공장들이 많아 보였어요. 그래서 문래동에 가게를 차렸어요.
그때는 문래동이 굉장히 바쁠 때라고 들었어요.
무척 잘되었죠. 처음에 장사 할 때 돈이 없어서 일주일에 바지를 제가 100장씩 만들어서 팔았어요. 지금은 안 만들죠. 그때는 이런 바지, 이런 거 많이 안 나가고 무조건 브루진 바지, 작업복이 그냥 한 색깔로 많이 나갔어요.
어떤 색이 많이 팔렸어요?
그때는 이런 죄수복 같은 색이죠. 이것만 많이 나갔어요. 그때는 그랬어요.
‘작업복’ 간판이 눈에 들어와요. 저 간판은 언제 설치했어요?
간판요? 90년대부터요. 원래 제가 미싱 기계를 8대 놓고 다른 동네에서 하청공장을 했었거든요. ‘태창피복’이 그때 그 상호예요. 남대문에서 마마아동복도 하고 원아동복도 하고 그런 곳에 납품할 때부터 이 이름을 쓴 거죠. 제가 어릴 때부터 미싱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여기 처음 와서 바지도 일주일에 100장씩 만들어서 팔았죠. 요즘엔 미싱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이 동네 오니까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처음에는 바지, 옷 만들고 이러다가 수선도 하고 그랬어요. 지금도 수선도 하고 끈 박는 일도 하고 마라톤 대회 때 쓰는 끈도 달고 해요.
작업복 수선도 맡겨요?
아니죠, 작업복은 수선 안 해요.
작업복은 왜 수선을 안 합니까?
싸니까요. 수선하는 돈으로 사요. 우리는 작업복을 팔아요. 납품하죠. 작업복이 싼 거는 만오천 원 이만 원하는데 그것을 수선하려면 힘들어요. 일당도 안 나오죠. 그래서 그건 안 해요.
요즘도 작업복을 많이 사요?
예전보다 많이 줄었어요. 옛날에는 11월 첫째 주 월요일 이럴 때는 밥을 못 먹을 정도로 바빴어요. 지금처럼 작업복이 다양하지도 않았고 그냥 곤색 잠바만 무척 팔았어요. 1995년도 정도에는 진짜 엄청 많이 팔았어요. 아침 되면 둘이서 작업복을 팔아야 했어요. 공장도 되게 잘 돌아갔거든요. 그리고 이만 원짜리, 싼 작업복도 잘 팔렸죠.
그럼 언제부터 조금씩 판매량이 줄었나요? IMF때 인가요?
그렇죠. 그때부터 안 좋아졌어요. 그래도 저는 기술이 있으니까, kbs 방송국에 소품도 하고 그냥 그냥 살았죠. 기술이 없이 단순하게 판매만 하는 사람들은 힘들어졌어요. 저는 판매도 하고 납품도 하고 그러니까 그냥 그냥 살았어요. 처음부터 수선하진 않았는데 돈도 벌어야 하니까 수선도 시작하기 시작했죠. 장사하면서 수선까지 하니까 손님도 더 왔어요. 지금도 수선하러 많이 와요.
이 동네 사람들도 많이 떠났나요?
좀 커서 다른 곳으로 가신 분들이 많죠. 시화공단이나 그런 곳으로 갔어요. 그래서 저도 지방으로 납품도 하고 그래요. 공장의 직원도 잘 없고, 사장님들 자식들이 물려받는 곳도 잘 없어요. 10년 정도 있으면 저도 그만하지 않을까요? 뼈 빠지게 일해서 다 물려줄 것도 아니고 우리 자식도 살만하니 그만하겠죠. 여기 금은방 있잖아요? 거기도 곧 없어져요. 팔렸어요.
사장님에게 문래동은 어떤 곳인가요?
직업이죠. 문래동의 명찰, 자수도 달고. 옷은 다 만든다고 생각하면 되죠.
양장점, 양복점 이런 곳과는 다르잖아요?
저는 남대문으로 보면 재봉하는 사람이죠. 기술자니까. 디자이너가 옷 가져오면, 저 같은 사람은 만드는 사람이죠. 미싱 공장을 운영하다가 인건비도 오르고, 운영이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문래동에 와서는 사실 라면집을 차리려고 했어요. 처음에는 분식집을 차리려고 생각을 했죠. 와서 계약하고 보니 제가 할 수 있는 게 옷뿐이라 식당을 하는 것도 무리겠다 싶었어요. 돈이 없으니까 처음에는 헌 옷도 팔고 옷도 만들고, 조금 돈 모이면 다시 만들고 팔고 그랬어요.
처음에 여기 들어오려고 했을 때, 분식집을 하려고 했는데 이미 주위에는 식당도 있고 그러다 보니 여기서 뭘 해야 할지 다시 생각하신 거군요. 다 그렇게 고민을 하고 들어오시더라고요.
제가 분식집을 차리려고 계약을 했는데, 우리 부모도 그렇고, 기술 있는 거를 하라고 가까운 사람들이 많이 말했어요. 옷을 만들어서 팔러 다니라고 계속 그랬었어요. 분식집 하려고 계약했다니까 펄쩍 뛰는 거죠. 기술이 있는데 왜 그걸 하냐고. 기술을 활용할 생각을 해야지 엉뚱하게 식당을 차리려고 한다고 말렸어요. 점을 보니까 돼지갈비 장사 그런 거 하면 잘 맞는다고 했고 돈이 없으니까 보증금만 걸어놓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으니까 시작하려고 했죠. 그러다가 이걸 차려놓으니까 어떻게 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어요. 그래도 이걸 차려서 우리 자식 공부도 하고 먹고 살았죠.
작업복은 어디서 가져오세요?
오파상. 도매상이 있어요.
그게 어디에 있습니까?
도매상은 동대문에 있죠. 예전에는 동대문 시장에서 많이 가져다가 팔았는데 지금은 동대문에서 작업복을 건드리지 않아요. 지금 선전하는 것들도 다 외국에서 만들어서 가져와서 본사에서 판매하는 거예요.
사장님 덕분에 여기에 일하는 분들은 작업복을 가까운 곳에서 구매할 수 있네요.
그렇죠. 도매는 또 소매를 못 하죠. 그리고 인터넷 판매는 사실 명찰도 못 달고 반품을 해도 택배비만 나가잖아요? 우리는 다 해줘요. 동네 장사니까 우리는 아무 때나 와도 반품해주죠. 명찰도 사면 그 자리에서 바로 달아주죠. 사실 요즘은 인터넷에서 명찰을 팔 수 있어요. 컴퓨터 자수 같은 것으로 금방 만들 수 있어요. 그 기계 자체가 8천만 원 정도 하는데 그걸 들여놓고 일을 하면 한 장씩 안 해주고 기본이 30장을 해야 해요. 한 장에 2천 원씩 받는데 한두 장 작업복을 사는데 그렇게 명찰을 사면 손해죠. 그래서 주문을 넣지 않아요. 기계를 들여놓은 업체에서도 기계가 돌리고 찍는 거니까 어쩔 수 없어요. 그러니 저희 같은 이런 곳 아니면 못해요. 작업복 사면 자수명찰을 기본으로 달아줘요. 또 일하다 보면 작업복이 잘 찢어지잖아요? 우리집에서 사면 A/S도 바로 해줘요. 다른 곳 보다 특출나죠. 우리집에서 판매한 건 반품도 다 해줘요. 너무 더럽지 않고 입을 수 있는 정도까지는요. 그러니까 여기서 살아남았죠.
어떤 회사의 명찰이 기억에 남아요?
매일 하니 기억나는 곳은 많죠. 주신주물, 종연기계, 아진정밀. 수없이 많아요. 대원특수코리아도 있고 대원정밀도 있어요.
문래동에 이름을 붙이는 것 같아요. 그동안 문래동은 어떻게 변했나요?
노루표페인트도 있었고, 비비안, 제니코 공장들도 있었는데 다 나가고 저쪽은 아파트가 들어섰어요. 법원도 떠났죠. 아마 여기도 10년 정도 있으면 없어지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는 주어진 대로 살고, 건강하게 사는 거 말곤 바라는 것도 없어요.
작업복 판매는 어떻게 변했나요?
작업복도 처음에는 만오천 원 이만 원짜리만 팔았어요. 그전에는 작업복만 파는 곳도 없었어요. 우리만 처음으로 그것만 팔았고 점심도 못 먹을 정도로 많이 팔았죠. 우리가 제일 많이 팔았어요. 처음에는 어떻게 기반을 잡았나 하면, 설날 되면 도매상에서는 인건비를 줘야 하고 물건은 내년에 팔아야 하니 돈이 없거든요. 저희는 알뜰살뜰 돈을 모아놨다가 거기서 1,000장, 2,000장씩 쌓아놓은 저런 작업복을 싸게 가져와요. 다음 해에 팔 수 있게 만오천 원 받는 그것을 오천 원에 가져올 수 있어요. 설 쇨 때만요. 그래서 한 두어 번, 두 해 정도를 1,700장, 2,300장 두 번 때 와서 옥상에 갑빠를 씌워서 다 갖다 놓고 가을에 파는 데로 한 다발씩 옥상에서 가지고 와서 또 팔고 그랬어요. 원래 도매상에서 가을에는 만오천 원짜리를 만천 원 정도에 팔거든요, 그러면 팔아도 남는 게 없는데 이렇게 하면 괜찮아요. 그런 방식으로 팔아서 기반을 좀 잡았어요. 일수라도 내서 제가 그걸 사다 놓는 게 이득이더라고요. 90년대에 그렇게 해서 조금 돈을 모았어요. 물건을 가져올 수 있도록요. 그해에 그것을 팔아보면 ‘이걸 얼마나 갖다 놔야겠다, 얼마나 팔리겠다’를 알 수 있어요. 싸게 팔아도 손해 보지는 않죠.
잘 팔릴 때는 얼마나 사두셨어요?
그때 2,300장 정도 사고, 거의 2,000장씩 두 번 산 것 같아요. 그것도 잘 맞춰야지 아니면 손해거든요. 한 해에 2,000장 사고, 한해는 거르고, 다음 해에 한번 또 2,000장을 산 것 같아요. 이제는 작업복을 만드는 공장이 한국에 없어요. 타산이 안 맞아서 한국에서는 못 만들어요. 미싱사 월급도 못 맞춰요. 예전에는 밤늦게까지 미싱사들이 일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다 잘 쉬어야 하고 평일도 6시면 퇴근하니 일 능률이 오를 만하면 끝나죠. 그래서 지금은 못 만들어요.
여기 안쪽은 처음 왔을 때부터 장판을 깔아 놓으셨어요?
원래 이쪽은 방이었어요. 이 밑에는 그냥 밥해 먹는 곳이었는데 계속 고쳐가면서 산 거죠.
작업복은 왜 좋을까요?
불이 안 나요. 천이 무겁고 두껍잖아요. 그런데도 입고 다니기도 좋아요.
저 장갑은 노란색, 파란색 있잖아요? 목장갑요.
장갑은 우리가 옛날부터 팔던 거, 그것만 팔아요. 장갑을 많이 쓰면 헐렁해지는데, 국산은 실이 짱짱하고 그렇거든요. 물론 국산 실만 쓰진 않아요. 중국산 보태는데 국산 실을 많이 쓰냐 적게 쓰냐에 따라 상품이 달라요. 우리가 파는 것은 지방이나 어디서 연락도 자주 와요. 그것만 써야 한다고 해요. 다른 곳에서 아무리 비싸게 사도 우리가 지금 파는 것만 찾는 사람들이 있어요. 장갑도 30년째 계속 저것만 팔거든요.
도대체 무슨 장갑이길래 그래요? 이름이 있어요?
옛날에는 신천지라는 명칭이 있었어요. 지금은 노인들이셔서 못하고, 그걸 받아서 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우리는 거기 제품만 써요. 실 짜는 데서 가져와요. 신천지가 거기서 기계를 짜서 그런지 그게 가장 좋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메이커 라벨도 안 붙여요.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만 계속 가져다가 팔고 우리 물건을 산 사람들도 전부 다 거기 것만 보내 달라고 해요. 믿고 쓰는 거죠.
작업복도 그런 제품이 있나요?
그렇죠. 여기서 많이 쓰는 것은 파브하고 티부크. 그 브랜드만 가져다가 팔아요. 거기가 작업복 전문으로 나오는 거라 좋고 선전도 나와요.
예전에는 이 청색이 많이 나갔다고 하셨었는데, 이름이 뭐죠?
브루진. 이제 그건 덜 나가요.
저 천 조각들 모아놓은 건요?
보루.
보루도 따로 만드는 곳이 있어요?
있죠. 보루는 신도림동에 평생 보루만 옷 공장에서 저걸 가져다가 잘라서 파는 분이 있어요. 그 사람이 포장해서 우리한테 파는 거죠. 그 사람은 한평생 그것만 해요.
방금 오신 분은 이걸 사가시던데요?
그 사람은 기루꾸 치는 사람.
기루꾸요?
기루꾸는 쇳가루 나오잖아요? 그것을 치워가는 사람이에요.
쇳가루를 수거하는 사람요? 그런데 그분은 보루가 왜 필요해요?
기루꾸를 가져오면서 돈을 안 주고 대신 기계 닦으라고 저런 보루를 주는 거죠.
공장에서 나오는 쓰레기인데 저분은 그게 돈이 되는 사람이고 그냥 가져가는 것보다 보루를 드려서 서로 필요한 부분을 채우네요. 여기에는 문래동의 의상과 관련된 다양한 물건, 이야기가 있네요.
안전화, 벨트, 기념타올, 장갑 등 없는 게 없죠. 이 동네 행사 되게 많은데 기념타올도 다 해요. 깔창도 있어요. 깔창도 좋은 거는 한 개에 오천 원이에요. 안전화에 들어가는 깔창요. 우산도 있네요. 다 있어요. 아까 그 사람은 보루뿐만 아니라 장갑도 들여다 줘요. 우리가 7시에 문 여는데 그 기루꾸 치는 사람이 공장 문 열기 전 새벽에 쇳가루를 싹 치워가요. 그럼 장갑이나 보루 놓고 가는 거죠. 그래서 여기도 일찍 열어야 해요. 기계 닦는 거 금방 쓰니까 매일 한 봉지, 두 봉지씩 가져다 놓거든요. 보루는 이 동네 아니면 못 듣는 말이죠. 담배도 보루를 쓰고, 시집가면 시어머니가 앉아서 뒤에 등받이 있는 것도 보루라고 해요. 그런데 공장 일하는 사람들은 보루라고 하면 이것으로 알아듣죠. 먹는 배가 있고 바다에 뜨는 배가 있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