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이 동네에 계셨나요?
1972년도에 이 동네 왔어요. 7월에 왔거든요. 제가 반장부터 통장, 새마을 지도자, 마을금고 이사, 교회 장로, 여기서 계속 그렇게 한 거죠. 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람이 박진박진 했어요. 그리고 17평, 19평 그런 작은 곳에서 여러 가족이 함께 살았고 이 다음다음 길이 명동길이라고 불렸어요. 여기가 엄청나게 좋았었는데 점점 옛날 모습이 없어졌죠. 2000년도 전후로 해서 여기서 살던 사람들이 공장을 세놓고, 여기서 탱크도 나오고 총도 만든다고 했던 곳이 문래동인데 이제는 그 업체들의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해요. 세도 못 내고 까먹고 있는 상황이 많다고 들었어요.
이 동네를 떠나는 분들도 많겠어요.
현장 일이 많아야 배도 만들고 차도 만들면서, 그래야 나라가 더 잘될 텐데 아쉽죠. 여기서 생활이 안되는 사람들이 떠났어요. 여기서 나가는 건, 서울에 비하면 쌀 수 있지만 그래도 다른 데보다 여기 세가 비싸요. 다른 곳 가면 공장을 크게 지을 수 있는데, 조그만 공장 보면 비싼 거죠. 지금은 빈집도 많아. 임대라고 써 붙여놔도 안 나가요. 저는 오래 살았으니까. 늙어서 떠난 사람도 봤고, 단순하게 이사 간 사람도 봤어요. 이사하면 연락이 어려워요. 제가 여기 노인회장까지 해서 연락해보면, 몇 사람 연락이 안 돼요. 저희 열쇠집도 그전에는 잘 되었어요. 동네에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여기서 건물을 쓰는 사람이 바뀌면 먼저 쓰던 거 안 쓰고 다시 바꾸고 그러니까 열쇠도 새로 갈고 그랬거든요. 근데 지금 봐봐요. 한두 명 일하고 대부분 변화가 없으니 열쇠를 깎을 일이 없어요. 손님 하나도 없을 때도 많아요. 뭣도 모르고 문래동 와서 시작한 사람들은 그냥 까먹게 돼요. 열이면 아홉은 까먹어요. 지금 문래동에서 뭐 한다고 하면 안타까워요. 사람이 없고 이 안에서 돈을 잘 벌어야 소비를 하는데 그게 어렵죠.
문래동은 어떻게 변하길 바라세요?
이곳은 제 종착역이죠. 여기에서는 큰 기대가 없어요. 지금 새삼스럽게 뭐 발전이 된다고 해도 쉬운 게 아니잖아요? 기계가 몇천만 원인데 하루아침에 이사할 수도 없어요. 많이 좋아졌지만, 어느 순간 멈춘 거죠. 제가 이 동네 처음 왔을 때는 밭이었어요. 다 진흙이었죠.
그래서 영등포를 진등포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여기도 그랬어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물이 찼죠.
처음부터 이곳에서 열쇠집을 하셨나요?
처음에 저는 여기는 아니고, 이 동네에서 양화점을 했어요.
양화점이요?
구둣방. 제가 구두를 잘 만들었어요. 럭키화점.
예전에는 어떤 신발들을 많이 신었어요?
구두. 추석 때 설 때는 한 십오일이나 이십일 정도 잠도 못 자고 만들었어요. 한 이삼일 전에는 구두 있는 거 미리 맞춘 사람도 있고, 발에 맞는 거 사가는 사람도 있었죠. 그때는 장사가 잘되었어요. 잠을 못 자도 신이 나서 만들었어요.
그때도 주변에 큰 공장들이 있었을 텐데 안전화 같은 것도 많이 찾았나요?
당시는 안전화가 아니고 장화를 많이 샀어요. 여기 땅이 질었거든요. 제가 이사 올 적에 여름에는 여기 이곳까지 물이 들어왔어요. 당시는 화장실이 푸세식이잖아요? 거기서 물이 나와서 도로까지 죽 지저분했죠. 그것 때문에 저 밑에 있는 사람들의 집값은 더 쌌어요. 당시는 100만 원도 안 갔죠. 집 한 채가. 80만 원, 70만 원, 60만 원, 좀 큰 거는 100만 원. 저쪽으로는 물이 차서 사람도 빠져 죽고 그랬어요. 엉망이었죠. 그래도 방들이 많고 사람도 많아서 박작박작했는데 방직공장도 철거가 되고. 경동산업이라고 숟가락 만드는 회사, 그 회사도 이사하고 IMF가 터지면서 양화점, 양장점, 양복점이 다 안되었어요. 예전에는 세 군데 모두 다 잘되었는데 다 안되기 시작한 거죠.
양장이랑 양복은 다른 거죠?
양복은 남자들이 입는 거고, 양장은 여자들이 입는 거죠.
기성복 나오면서 안되었다고 들었어요.
그 말도 맞아요. 그 후로 어려워졌죠.
그럼 양화점은요?
양화점도 마찬가지죠. 예전에 이 동네를 다니다 보면 신발 밑에 ‘럭키’라벨이 많이 보였거든요. IMF가 딱 터지니까 안 되고 아들이나 딸이나 럭키화점에서 구두 맞춰 준다고 하면 안 와요. 메이커가 아니니까 안 신는 거죠. 우리 아이들도 남대문 시장가면 옷이 싼데 남대문에서 사 오면 메이커가 아니라고 안 입었어요. 그래서 다른 거 했어요. 제가 왜 열쇠를 배웠냐 하면 양화점이 안되니까 하루에 삼만 원 벌기도 힘들었거든요. 그때 당시 과일, 채소 이런 거 파는 사람들이 하루에 십오만 원 이십만 원 벌었는데 저는 삼만 원도 못 버니 어떻게 먹고 살지 걱정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며 가며 보니까 중장비 하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관광차로 어디를 가면 돈을 많이 쓰고 그러는 걸 보니 그 사람이 돈을 잘 버는 거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그 사람한테 부탁했어요. 승낙을 받고 중장비 중고차 두 대를 샀어요. 새것은 1억이 넘는데 그 중장비가 뭐냐면 바위를 구멍 뚫어서 폭파하는 거예요. 하나는 바람 넣는 펌프, 하나는 구멍 뚫는 거죠. 두 대가 한 조라서 같이 샀어요. 그런데 한 몇 달 하다 보니까 안 되는 거예요. 그 일도 막차를 탄 거죠. 그게 잘 된다 하니까 이 사람도 시작하고 저 사람도 시작한 거죠. 가는 데마다 골프장이 전국적으로 생겼어요. 그러니까 너무 많아서 전국에서 골프장을 그만 지은 거죠. 그러니까 기계가 다 어디로 가겠어요? 그냥 멈췄어요. 그거 할 때 사당동에 있는 중장비 차 주차장을 이용했는데 그 근처에서 이런 가방을 들고 오른팔에다가 붕대를 감고 왼손으로 구두 닦는 사람이 구두를 잘 닦는 거예요. 게다가 열쇠까지 고쳤어요. 제가 왔다 갔다 몇 번 하다 보니 ‘아, 이거 하면 돈 조금 벌겠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양화점 그만하고 문래동 길에서 구두 닦는 박스를 놓고 열쇠까지 한 거죠. 그 박스 옆에다.
열쇠 기술은 그분한테 배우신 건가요?
그 사람한테는 물어만 보고 왔어요. 구두 닦는 박스를 나보다 먼저 한 사람한테 인수 하면서 ‘열쇠도 하려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했더니 자기 아는 사람이 서울열쇠협회 부회장이라고 했어요. 그 사람한테 가면 열쇠도 하고 배울 수 있다고 해서 동대문, 거기까지 찾아갔죠. 회비 얼마 내면 열쇠 자격증까지 주고 가게에다 허가, 허가업체 등록, 협회 등록업체를 준다고 했어요. 일단 부회장님께 열쇠를 배우고 싶은데 어디서 배우면 좋냐고 여쭤보니 ‘남대문 장미열쇠라고 있는데 거기가면 열쇠 재료도 하고 기술자들을 잘 안다. 거기 가보라’고 했어요. 거기 가서 보니까 또 양재동 사는 사람이 기술이 좋은 거죠. 외제 열쇠도 잘 열고 기술이 좋았어요. 그래서 그 사람을 찾아갔는데 그냥 안 가르쳐 주잖아요? 돈을 줘야지. 거기다가 드릴 같은 연장도 사야 했어요. 그렇게 시작했어요. 그 당시엔 소액재판이 많았는데 돈을 안 갚는다. 그러니 돈 좀 받게 해달라는 종류의 재판이 많았어요. 갚지 않으면 결국 법적으로 입회인 두 사람 세우고 열쇠 기술자 하나 가서 방문 열고 들어가서 집에 딱지 붙여요. 그러려면 열쇠 기술자가 있어야 해요. 그걸로 일을 많이 했어요. 집행에 참여하려면, 다양한 자물쇠를 열어야 했어요. 그러려면 그 자물쇠들을 사서 연구를 해야 했죠. 잘하는 사람한테 가서 물어보기도 하면서 다 했어요.
대단하세요. 처음에 열쇠 여셨을 때 그 느낌을 기억하세요?
기억나요. 기분 좋죠. 당시 문을 하나 열어주면 5만 원을 받았어요. 기술이 느니까 키로 여는 거랑 똑같았어요. 그러니까 돈을 받죠. 처음에는 친구들이 비웃었어요. 구두 만드는 놈이 무슨 열쇠냐고. 그래서 제가 나중에 너희 놀랄거라 생각하고 열심히 했어요. 90년대부터 10년 동안은 돈도 잘 벌었어요. 법원 집행에 같이 다니면서 문을 열어주고 잠궈 주는 그 기술로 그때 당시 5만 원씩 받았죠. 당시 큰돈이었어요.
그러면 법원이 이사하고 지금 이 자리로 오신 건가요?
그때 왔어요. 법원을 따라가지 않기로 했죠. 집행관은 밥을 두 시나 세 시에 먹는데 집행관 점심 먹을 때 저도 먹어야 했어요. 저는 아침 5시에 먹어서 세 시까지 빈속으로 왔다 갔다 하니 얼마나 힘들어요? 조금만 시간이 안 맞으면 밥 먹을 시간도 없으니까 김밥 사서 먹고 그러니까 사람이 말랐었어요. 힘들죠. 돈은 버는데, 지쳤어요. 그런 걸 보니까 돈을 벌지만 제가 오래 못 살겠더라고요. 그만하자 그래서 여기로 왔어요. 여기도 한 10년 넘었어요. 여기가 원래 부동산 자리였는데 너무 작아서 안 나갔어요. 2년 동안 비어있었어요. 저도 몇 달 하다 좁아서 못하겠다고 하니까 월세도 좀 더 깎아줬어요. 사실 열쇠집은 가게가 필요 없거든요. 저한테 딱 맞춘 곳이죠. 이 동네에 빈손으로 와서 여기까지 되었어요. 지금은 욕심부릴 필요도 없어요. 가끔 손님도 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