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앉으세요, 나는 여기 앉아요. 이 동네에서 42년 되었어요.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지금은 많이 달라졌나요?
많이 달라졌지. 여기 상권이 많이 죽었어요.
예전엔 어땠어요?
예전에 좋았죠. 2000년도 넘어서부터 법원이 간 후로 상권이 죽기 시작한 거죠. 그전엔 좋았어요.
목동인가, 오목교로 이전했다는 법원 말씀하시는 거죠?
예전에 가든빌이 있었어요. 가든빌 자리가 원래 법원 자리죠. 제가 그 앞에서 구두도 닦고 열쇠도 하고 그랬어요. 동네 통장도 17년 이상했죠. 그래서 제가 이 지역을 잘 알아요. 제가 이 동네 숟가락이 몇 갠지, 젓가락이 몇 갠지 다 알아요.
지나다니다 보면 사장님께서는 늘 바쁘게 일하고 계셨어요. 제 작업실 열쇠도 사장님께서 만들어주셨잖아요. 그 열쇠 없으면 작업실에 들어가지도 못해요.
저 모르는 사람 없어요.
사장님께서 느꼈을 때는 법원이 떠난 다음부터 동네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 봐요.
법원이 있을 때는 변호사, 법무사들이 일렬로 쭉 있었고, 다방도 많았어요.
저쪽에 정다방도 있고 제 작업실도 예전에 신정다방 자리였어요.
그렇죠. 이 동네에 다방이 스무 곳이 넘었어요. 지금은 영업 안 되니까 거의 없어졌죠. 그러니까 법원이 있어야 누구 만나러 오고 법무사, 변호사들한테 들어오는 돈이 마을금고나 상권으로 가는데 그런 게 없어진 거죠. 예전에는 돈이 있으면 마을금고에 딱 넣어뒀어요. 퇴근하기 전에 돈을 싹 넣고 필요할 때 찾아가는 거죠. 그땐 문래동에 사람이 박진박진 했어요. 그땐 공장도 별로 없었어요. 2000년도 전에는 여기까지는 공장이 많지 않았어요. 4가에는 2000년도 전후로, 1995년도 후로 조금씩 늘어난 거죠. 제가 1976년도부터인가 통장을 시작했거든요. 저쪽부터 시작해서 두 줄(거리) 이 한 반, 총 8반이 있었어요. 그 8반을 움직이는 통장이 한 명이에요. 4가는 완전 토박이고 통장도 한 20년 해서 동네의 여러 일을 오래 했어요. 1975년도부터 마을금고 이사도 했는데 마을금고가 문래1동으로 넘어가는 바람이 그만뒀어요.
여기 공장 있는 자리들에는 어떤 가게들이 있었어요?
다방, 술집, 양복점, 양장점, 구둣방, 세탁도 등등 많이 있었어요. 4가에는 17, 19평에서 양쪽 가에는 20, 22평 정도 되는 건물들이 늘어서 있잖아요? 원래 4가가 영단500채라고 불렸는데, 여기 500채가 일본 군인 숙소였어요. 그래서 집 형태를 보면, 칸칸이 막힌 곳은 사병들이 머물던 곳이고, 가운데 독립으로 있는 것들은 장교들 숙소였어요. 큰 것들 몇 개씩 있는 곳은 소대장, 중대장 숙소죠. 그때 당시에는 저 앞이 목포식당 길이라고 불렸는데 아침저녁 그 길이 아주 빡빡하게 사람이 못 다닐 정도였어요. 명동거리 같았죠. 그리고 지금 문래동 5, 6가 그 밑으론 무허가 판자촌이 쫙 있었어요. 양쪽 뚝 밑으로 꽉 차 있었죠. 삼강산업 밑에 담벼락에도 사람이 살았고, 저쪽 인천 가는 길에도 사람이 살았어요. 일본 군인 숙소에서 일본군 떠나고 제 기억에는 여기 17, 19평 평수의 집에서 사람들이 15명씩 살았어요. 여러 가족이 함께 살았죠. 그러다 보니 문래동에는 사람들이 박진박진 했어요. 사람이 많이 살았으니까 사 먹기도 많이 사고 돈을 쓰고 그랬어요. 당시에 저쪽 3가에는 방림방적이 있었는데 없어지고 아파트가 들어섰어요. 제가 듣기로는 일본 교포의 땅이었는데 그 땅을 돈 조금만 주고 정부에서 가진 거라고 했어요. 그렇게 해서 아파트 생겼죠.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는 4가에 상권이 많고, 사람들도 많았겠어요.
그렇죠. 그렇게 2000년도 넘어서부터는 사람이 떠나가고, 공장이 하나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제 생각엔 여기가 언덕이 없고 그러니까 평지잖아요? 그러면 움직이기 좋고, 운반하기도 좋아요. 그리고 근처 공장이 있고, 영등포도 가깝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많이 온 것 같아요. 이 4가까지요. 이 안에서는 탱크 부속품도 만들고 총 부속도 나오고, 자동차 부속도 나오고, 안 나오는 것이 없어요. 각종 부속품이 한 군데서 만드는 게 아니라 여러 군데서 만들어져서 모이는 곳이에요. 배에 들어가는 물건, 자동차에 들어가는 물건, 어디 안 들어가는 것 없죠. 저쪽엔 핸드폰 부품 만드는 공장도 있고, 케이스 공장도 있어요. 사람이 많이 살았던 동네에 공장들이 하나씩 들어오니까 사람들이 이사하고, 철거민들이 많았는데 다 떠났죠. 예전에는 아침에 애들 학교 보낸다고 빡빡했고 회사 출근하는 사람들 몇백 명이 일하고, 방림방적도 몇천 명이 일했는데 점점 사라지고 동네가 변한 거죠.
지금은 어떻게 변해가고 있어요?
삭막해요. 아주 삭막해요. 밤에 나오면 사람도 없어요. 예전엔 집 한 채에 막 열댓 명씩 살던 그런 곳이 공장으로 바뀌면서 일하는 사람 한두 명이 전부죠.
공장에 일하는 분들이 많지 않아요. 혼자 일하는 곳도 많이 보입니다.
그래요. 그나마도 일이 있으면 사람이 많은데, 예전보다 공장에도 일이 없어요. 게다가 재건축을 하네, 뭘 하네 하는 소리를 들으니까 건물주들은 재투자를 안 해요. 건물을 고치거나 뭘 할 생각을 안 해요. 그리고 여기가 빈자리가 많아요. 있어도 노는 자리도 많죠. 공장들이 예전에는 밤 12시까지 일했는데 요즘은 일이 없으니 6시면 문 닫고 가요. 아침에도 일찍 나왔었는데 9시 넘어서 나오는 곳도 많아요. 그러니까 계속 상권이 줄어요. 동네 술집도 예전엔 장사가 잘되었는데 지금은 이 주변 사람들이 예전만큼 돈을 못 버니까 어렵죠. 술도 안 먹고, 다방에서 커피도 많이 시켜 먹었는데 지금은 그냥 컵에 믹스커피 마시고 결제를 미루다가 도망간 사람, 식당 밥값도 떼먹고 간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요. 신정다방 그 자리, 지금 거기 싸게 들어왔죠? 예전엔 엄청 비싼 곳이었어요. 무척 잘 되는 곳이었거든요. 근데 지금은 싸도, 거긴 잘 안 들어가려 해요. 그러니까 예술 하는 분들이 거기를 차지하는 거죠.
예술 하는 사람들이 외부 사람들을 많이 끌어들이거나 다방을 다시 해도 재밌겠어요.
좋겠죠. 그런데 이 동네는 사람이 없어서 어려울 것 같아요. 여기 식당들도 마포갈비집, 능이버섯집, 마늘통닭집 거기 몇몇 만 손님이 있고 나머진 사람이 없어요. 다른 곳은 돈 다 까먹고 나가는 거죠. 누가 전시를 한다든지 예술 활동 때문에 오는 사람이 식사할 수도 있고, 열쇠를 깎을 수도 있고, 하여간 사람이 많이 모여야지 상권이 형성되잖아요? 떡장사만 있으면 못살잖아요. 떡장사, 밥장사, 국수장사 이런 식으로 서로 엉켜서 이 사람이 팔아주고 저 사람이 팔아주면서 엉켜서 사는 거죠. 그게 안 되니까 혼자 하니까 어려워요.
주변에서 재료도 구하면서 같이 먹고 사는 문제가 얽힌다면 좀 낫겠어요.
아무래도 그게 좋죠. 밥도 먹을 수 있고 철물점에서 뭘 살 수도 있고, 문방구도 살 수 있고 그런 거니까요. 전에는 동네에 문방구가 있었는데 홈플러스, 백화점 같은 데서 사지 여기선 시시한 거나 급한 거만 산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동네에 뭘 차린다고 하는 것 자체가 돈을 낭비하는 게 된 거죠. 우리 같은 열쇠집도 제 단골 외에는 인터넷으로 사요. 상권이 뭐 이 동네 뿐은 아니지만 어려워요. 큰 기업들은 자동화해서 5~60명이 할 것을 기계가 채우고, 계속 우리는 살기가 힘들겠죠.
사장님께서 생각하는 문래동의 이미지가 있어요?
2000년도 전에는 ‘공기가 나쁘다’는 소문이 났어요. 한국타이어가 근처에 있었고 그 바람이 문래동으로 오고 고무신공장 같은 것도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공기 측정기가 동사무소 위에 있었는데 하필 그 2층이 중국집이었어요. 중국집 주방에서 나오는 김이 죄다 측정기 위로 뿜어져 나오고, 그러니까 좋게 나올 이유가 없죠. 그래서 제가 동장님한테 얘기했어요. ‘동장님, 측정기가 저기 있고 중국집에서 나오는 김이 측정기로 들어오는데 잘 나올 이유가 있겠습니까? 측정기를 다른 곳으로 옮기십시오.’
예술 하는 사람들이 와서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1동도 그렇고 2동에 있는 예술가들도 봤는데 쇠로 연장 같은 것도 만들고 길에다가 붙여놓고 그런 게 괜찮았어요. 서먹서먹한 것보다 좋아요. 처음에는 저쪽 문래동 3가 쪽으로만 예술 활동을 하려 했었어요. 거기도 집세가 싸요. 2층, 3층은 더 싸죠. 그러니까 예술 하는 사람들이 들어오고 그런 데로 좀 살았어요. 거기는 밤에도 조금 사람들이 모여요. 지금은 4가도 더러 오는 것 같아요. 4가에서 공방, 정다방 같은 게 하나하나 생기는데 그래도 사실, 4가에서는 이 안이 살아야 해요. 그것이 원칙이죠. 외부 길거리가 사는 게 아니라 내부가 살아야 해요. 틀 안쪽이 살아야 해요.
문래동에서 어떤 추억들이 많으시겠어요. 고마운 부분도 많이 있는 삶의 터전 같습니다.
삶의 터전이죠. 저는 지금 75세가 되었고 우리 또래들이 문래동에 왔을 때 태어났던 아이들이 지금은 학부형이 되고 저희는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되었어요. 그때 당시에는 동네 친목계들이 있어서 함께 식사도 하고 화투도 치고 술집도 가고 그런 시골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지금은 추억이란 게 없어요. 또래들도 거의 다 떠나고 다섯도 없어요. 사람이 많이 살아야 하는데 다 이사하고 떠났죠. 젊은 사람들 모임은 없어요. 여기에 나이 많은 사람들만 살고 자식들은 다 외지에 있어요. 동네에서 즐겁다거나 그런 것들에 대한 미련이 다 끝났어요. 저도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예요. 안 하려고 해도 전화가 자꾸 와요. 저는 오래되었기 때문에 고장이 나면 고쳐달라고 전화가 와서 낮에 여기를 못 비워요. 한강 가서 자전거도 잘 타는데 이것도 못 할 때가 많아요. 당신이 계속 이런 일을 하려면 동네를 잘 알아야 해요. 사람이 없다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