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이곳으로 오셨나요?
제가 1969년도 용산구 용현동에서 살다가 1970년 1월 20일에 대림동으로 이사 왔어요. 그때 여기는 도로, 학교도 없었고 논밭이었어요. 대림동에서 구로동 다니는 길이 논밭이었고 초가집만 있었죠.
70년도에 이 동네에는 초가집만 있었어요?
제가 기억하기로 대부분 초가집이고 기와집이 몇 군 데 없었어요. 게다가 원래 대림1동 위쪽은 낮은 산이었어요. 해병대 송신소가 있었죠. 75년도인가 76년도인가 송신소가 강화도로 이사하고 국방부에서 민간에게 그 땅을 팔았어요. 산을 개발하려면 흙을 파야 하는데 도로가 없었죠. 도로가 없는 곳에 개발 때문에 지나다니는 큰 차가 주민들이 쓰는 빨간 하수도를 부러뜨리곤 했어요. 그 하수도를 지키려고 주민들이 흙을 못 파게 막기도 했죠. 그러다가 이 앞으로 도시 계획이 생기면서 길이 났어요. 기억에 남는 것은 70년대 2동은 비가 무척 오면 물이 하도 많이 들어서 배가 다녔어요. 대림역 있는 근처에 둑이 있는데 그곳이 전부 학고방집들이고 리어카만 다니고 차도 못 다녔죠. 지금은 없어진 대림시장 앞이 버스가 다니고 교통이 좋아서 1동의 땅값이 비쌌는데 지금은 2동이 중국 사람들 가게들로 발전되어서 1동보다 땅값이 비싸요. 70년대, 80년대를 지나서 동네가 발전은 했지만, 나이를 먹어서 이제는 그런 신경을 많이 안 써요.
예전에는 큰 회사들도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이 동네에는 예전에 아모레 화장품, 신신파스, 대림보일러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저쪽 병원 삼거리 건너편에 한국 모방이라는 회사도 있었는데 거기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이 동네에 많이 살았어요.
요즘 쌀집을 보기가 힘든데 이런 풍경들이 신기합니다. 이 동네에서 쌀집을 운영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
70년도에는 쌀이나 연탄은 전부 외상이었어요. 외상 장부가 있었는데 먹고 살기 힘들다고 외상을 바로 못 갚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면 외상 장부를 가지고 월급날 회사 앞에서 기다렸다가 받았죠. 그런 일도 많았고 밤에 도망가는 사람도 많았어요. 도시락도 싸고 밥도 한 공기씩 많이 먹던 시절에는 다섯 식구면 쌀 한 가마를 먹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제가 20년 넘게 통장을 했는데 예전에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재산세, 불우이웃돕기 등 통장으로 일이 많았거든요.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동네에 관심 두기 어려워요.
골목을 다니다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중국 사람들인 것 같아요.
중국 사람들이 많아졌죠. 지금은 대림동에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실제 동네에 살지 않는 인천이나 안산 등 각지에서 여기 시장에서 물건을 사거나 친구를 만나러 많이 온다고 들었어요. 여기는 예전 집 구조 그대로라 젊은 사람들이 없어요. 집들의 방이 비었고 그곳으로 중국 사람들이 왔어요. 각자 혼자 온 중국 사람들이 결혼해서 가정을 만들기도 하고 어떤 사건들도 많았죠. 2동이나 1동 마찬가지예요. 저는 오랫동안 장사를 한 사람이지만, 이 동네에서 중국 사람들 대상으로 영업하지 않아요. 쌀장사를 하려면 몇 식구가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봐야 하는데 물어보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단골이 점점 없어지지만, 제가 먼저 중국 사람에게 묻거나 그러지 않아요. 시장도 전부 중국 사람들의 물건을 팔기 때문에 가지 않죠. 그래도 요즘은 이 동네에서 어떤 사건도 없고 그 사람들의 문화도 많이 좋아졌고 거리도 깨끗해졌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