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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슈퍼
덕일슈퍼
(영등포구 도림동)
칸타빌마트

 

언제 이곳으로 오셨나요?

여기를 1981년도에 왔어요. 제가 새댁 때 여기로 왔어요. 예전에 여기 가게 터가 있었어요. 이쪽 안쪽으로 주인집, 다락방이었는데 새로 짓고 슈퍼를 시작했죠.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 이 동네는 어떤 풍경이었어요? 

헌 집이고 기와집이고 전부 그런 식이었죠. 길도 없었고 전부 리어카만 지나다녔죠. 저쪽에 덕수당의원이 있는데 그 사장이 이쪽에 살았어요. 그 사장하고 저희만 차가 있었어요. 이 동네에 차가 두 대뿐이었죠. 

 

그런 시절에는 지금 같은 길도 아니라 차가 다니기도 힘들었다고 들었습니다. 동네마다, 시기마다 파는 물건도 달랐다고 하던 데, 그때 여기에서는 무엇을 팔았어요? 

그땐 다 팔았어요. 콩나물도, 두부도 팔았죠. 여기 도로도 1차선이었고 시장도 길을 건너가야 해서 멀었어요. 길 건너 도랑이었는데 아파트 들어서면서 다 메꾸고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이 골목에도 겨우 리어카 한 대만 끌고 다닐 수 있었는데 새로 집도 짓고 그렇게 도로도 정비 되었죠. 예전에는 슈퍼에 손님들이 줄을 섰고, 하루에 150, 160만 원씩 팔았어요. 손님들이 무척 많았죠. 이 동네에는 채소 가게나 그런 게 없어요. 그때는 콩나물도 세 통씩, 100원씩 하는 콩나물인데 그렇게 팔았고 두부도 50원, 100원 하는 것을 10판씩 팔고 그랬어요. 파도, 상추도 무척 팔았죠. 제가 시어머니를 모셨는데 시어머니와 자식들은 이 다락방에 있고 남편하고 저하고 여기에서 무척 바쁘게 지냈어요. 5시면 일어나고 저녁에는 1시, 2시까지 일했어요. 그렇게 하고 살았어요.

 

그러면 90년대쯤 되면서 이 동네가 바뀌었나요?

아뇨, 그대로죠. 정비가 되었으니 동네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화가 없어요.

 

언제부터 손님들이나 슈퍼에 변화가 생겼어요? 예전보다는 손님들이 적어지는 시기가 있었을 것 같아요. 

줄었죠. 백화점 생기고, 마트 생기다 보니 손님들이 나눠 졌어요. 점점 이 옆으로도 슈퍼, 가게들도 많아졌어요. 그러다가 지금 슈퍼나 가게들은 다 없어졌어요. 이 옆에 태양슈퍼, 저 위에 개미슈퍼, 이 밑에 커피숍 자리의 영진슈퍼 그리고 저쪽에도 두 군데 있었고 횟집 옆으로도 하나 있었어요. 가게들이 무척 많았어요. 그래도 저희는 오래 했으니까 단골손님들이 많았지만, 다른 가게들은 다 없어졌어요. 몇 년 되었죠. 담배도 4, 5년 되었나? 담배는 가깝게 있는 가게들, 50미터 안에서는 거래가 안 되는데 원래 저희가 없었는데 저쪽 슈퍼가 없어지면서 저희가 하게 되었어요.

 

그 시기는 언제쯤이죠?

제 기억으로는 IMF 그쯤 같아요. 손님도 줄고 가게도 많이 나왔어요. 길 건너 편의점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여기도 도림마트, 럭키 등 바뀐 가게도 많아요. 

 

그때가 그립기도 하겠어요. 

돈 많이 벌 던 시절이 좋았죠. 이런 과자들도 일주일에 50만 원씩 팔았었어요. 예전에 굉장히 잘 된 거죠. 여기 집을 짓고 이 앞의 창고도 두 군데 썼었어요. 그 창고로 과자 배송차가 두 대가 들어올 정도였어요. 그리고 병으로 된 콜라도 배송차 한 대 만큼 들여놨었어요. 그렇게 잘 되었죠. 그런 것을 치킨집으로 가져가고 배달하고 그랬어요. 제가 얼마나 힘이 센 줄 아세요? 배달해달라고 하면 3층이고 어디고 전부 들고 계단 올라다니고 그랬어요. 

 

요즘 오는 손님들은 무엇을 찾아요?

사람마다 다른데 요기되는 것을 찾아요. 빵은 두지 않았고 초코파이 같은 걸 사요. 방금 보았지만, 저쪽에 초코파이와 비슷한 상품 3,500원짜리 그것도 사가잖아요? 여기에서 오며 가며 사는 이야기 하다가 물건 사가요.

 

사장님께서 운영하면서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나요? 

일하고 사느라 바빠서 그렇게 특정한 기억은 없어요. 예전에는 다 외상 거래였잖아요? 천만 원 정도 못 받은 기억도 있고 그런 손님도 있었어요. 죽거나, 말없이 이사하고 그래요. 쌀값도 15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외상으로 거래했는데 못 받은 적도 많고 어떤 사람은 15일만에 주고 그래요. 또 좋은 사람은 좋아요. 그래도 어떤 손님은 외국 갔다 와서 못 왔다고 하면서 한 3년 만에 나타나서 3만 원을 주고 간 적도 있어요. 고맙더라고요. 여기에서 중, 고등학교 나왔는데 외상값 두고 살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졸업하고 와서 외상값 주고 간 사람도 있었어요.

 

슈퍼는 사장님께 어떤 곳인가요?

삶의 터전이죠. 여태까지 이것만 해서 다른 건 없어요. 앞으로도 해야죠. 

 

짧은 시간에도 손님이 많이 다녀가세요. 단골손님들은 많이 있었죠? 

많았죠. 사람들 와서 이렇게 놀고 가고. 코로나 때문에 어딜 가지 못하니까 많이 모이지는 못하지만 와서 술도 한 잔 마시고 그래요. 저는 통장도 오래 했고 동네 주민센터에서 운동도 오래 하고 활발하게 지냈어요. 지금은 장사도 안되고 코로나 시기라서 여기에 있었어요.

 

슈퍼와 사장님 모두 이 동네에서 함께 변하고, 살아가는 느낌이 들어요. 이 동네도 계속 변화하고 있죠? 

저는 평생을 이 동네에서 살았어요. 그런 것 같아요. 지금 이 동네에는 한국 사람들이 없어요. 중국 사람들이 반 넘게 있어요. 대림동에서 벌써 이 동네로도 넘어왔죠. 여기 집들에 중국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이 없어요. 그 사람들은 돈을 벌어서 지하에 살지 않아요. 2, 3층에 살거나 혼자 와서 마음 맞는 사람끼리 결혼해서 동네의 집도 사요. 그분들은 현장 일이든 뭐든 돈을 주면 일을 가리지 않아요. 한국 사람들은 대학이나, 어떤 걸 따지면서 일을 하는데 그 사람들은 달라요. 그리고 건물의 3, 4층에 할머니들이 살아요. 이 동네에 한국 아이들이 없어요. 젊은 한국 사람들은 떠났어요. 대부분 중국 사람들 아이예요. 초등학교에도 중국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이 슈퍼를 찾아주는 손님들께 한 말씀 해주세요.

고맙다는 말, 그것뿐이죠. 다른 말이 뭐 필요 있겠어요? 다른 슈퍼들 많이 다녀봤겠지만, 저만큼 오래 한 사람을 찾기 힘들 거에요. 잘 없죠? 저는 이 집 짓기 전부터 와 있었어요.

 

저는 슈퍼를 생각하면 어렸을 때 맛있는 거 먹으러 가고 재미가 있는 곳이었어요. 

예전에는 사람들이 무척 즐겁게 여기 왔어요. 아이들한테 과자 먹으러 가자고 그러면 엄마 손 잡고 다 왔어요. 여기 아이들 과자가 얼마나 많았는데요? 장난감이고 뭐고 다 아이들 거였어요.